[노성열의 AI경제] AI 가속 시대, 대한민국 R&D는 '판을 바꾸는 설계자'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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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kpinews.kr | 2026-10-15 11:16:15

AI4Science 패러다임 대전환…정부, 예산지원 넘어 통합 설계자로
실패율 0% 관성 깨고 '5% 파격적 도전 트랙' 신설…도메인 AI 육성
실패 줄이던 60년에서 새로운 판 짜는 60년으로…R&D 전면 재설계

지난 60년간 대한민국 과학기술은 선진국 기술을 신속하게 추격하고 실패를 줄이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하지만 2024년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이 모두 인공지능(AI) 관련 연구에 돌아간 사건은 전 세계에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세계는 이미 기존의 연구 패러다임을 버리고, AI가 가설 수립부터 데이터 분석과 실험까지 주도하며 연구의 전체 속도를 폭발적으로 가속시키는 '과학기술용 인공지능(AI4Science)'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AI의 가장 큰 본질적 힘은 단지 일상의 편의를 돕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수십 년 걸릴 과학기술 연구의 시차를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가속화하는 데 있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패권국들은 과거 80년간 유지되어 온 '선형적 R&D 모형'을 폐기하고, 정부가 단순한 재정 지원자(Funder)를 넘어 전략적 통합 설계자(Mobilizer)로 진화하는 대전환을 감행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R&D 체계는 여전히 성공 가능성이 높고 정형화된 과제에만 자원을 분배하는 평균의 함정과 추격형 규제 틀에 갇혀 있다. 남들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더 빨리 달리는 방식으로는 다가올 60년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국가 R&D 체계를 AI 기반 연구 가속화 시대에 맞춰 시급히 대전환해야만 한다.

마침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을 AI 시대에 맞춰 어떻게 바꾸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심층 토론회가 13일 국회에서 열렸다. 한국 과학기술인을 대표하는 양대 단체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과총)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하 과기한림원)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와 함께 개최한 'AI 시대, R&D 패러다임 대전환' 행사에서다. 과총과 과기한림원이 우리나라 과학기술 R&D 정책 시행 60주년을 맞아 연달아 열고 있는 총 3회의 과학기술 60년 미래포럼 중 두 번째 행사이다. 지난 8월에 열린 제1차 미래포럼에서는 '한국 과학기술 60년, 성장의 유산과 새로운 과제'를 주제로 과거 회고와 미래 도전을 다루었다. 11월에 열릴 제3차 미래포럼은 '이공계 인재양성 생태계의 재설계'라는 제목으로 국가경쟁력의 원천인 과기인재 교육과 관리를 집중 탐구할 예정이다.

필자는 그동안 지면을 빌어 AI의 가장 큰 힘은 과학기술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효과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왔다. 지식과 학습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산업 체계도 근본적으로 재편하겠지만, 그보다 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천문학 등 기초 학문의 발전이 수십 배, 수백 배 빨라져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다시 쓸 것이라고 말이다. 특히 기초과학 연구는 응용과학이나 공학의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산업화로 곧장 연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학과 산업 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이다. AI 때문에 과학 연구가 빨라지고 더 자동화·체계화돼 기업이 그대로 사업화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기간산업의 경쟁력도 획기적으로 달라지며 차별화될 전망이다. 국가 간 과학기술 R&D의 실력 차이가 곧장 국력의 차이로 이어진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 주요 국가들이 과학기술을 국가 안보대상으로 격상시키는 이유다. 더 우수한 과학기술을 먼저 확보하지 않으면 국가의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북으로 이념의 대치 상태에 있고, 더구나 핵보유 잠재적국을 머리에 진 한국은 말해 뭐하랴. 우리는 국가의 지속 생존과 미래 번영을 과학자에게 걸 수밖에 없다.

이날 주제 발표에 나선 박찬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부원장은 AI가 단순한 기술적 계기(Trigger)를 넘어 지식생산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국가혁신체제(NIS)와 과학기술 정책 패러다임이 전면 재편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박 부원장은 미국 등 해외의 AI 기반 과학기술 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독일 프라운호퍼의 정책 진화 모델에 따르면, 과거 과학기술 정책은 시장 실패(비용 효율성)와 시스템 실패(효과성)를 극복하는데 집중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방향성과 임무(Directionality & Mission)'를 제시하는 전환 실패의 극복 단계로 진화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국가 혁신체제의 평면적 주체들이 AI를 중심으로 수직 정렬되는 중이다. 박 부원장은 우선 미국 과기(S&T) 정책의 대전환을 소개했다. 1945년 미국 과기정책의 아버지 바네바 부시가 제시한 '끝없는 프론티어(Endless Frontier)' 모델이 종언을 고했다는 것이다. 맨해튼 프로젝트, 아폴로 계획 등 옛 정책은 지원 자금 집행기관 중심의 선형 모형과 지식의 양적 축적을 지향했다. 다시 말해 큰돈을 쏟아부으면 과학은 저절로 발전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미국의 새로운 과학정책인 '새로운 황금기(New Golden Age)'는 정부를 통합 설계자(Mobilizer)로 정의하고, 임무 중심의 AI 기반 연구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난 것이다. AI가 과학의 황금기를 여는 시대에는 정부가 돈줄을 대는 물주에 머물지 않고, 특정 임무를 부여하고 관리하는 종합 관리자로 바뀌어야한다는 구상이다.

미국은 과학의 도전과제, 즉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의 질문 자체를 먼저 바꾸었다. 미국 OSTP(과학기술정책실)는 핵심·신흥기술(CET) 리더십 유지, 과학 엔터프라이즈의 활성화, 경제성장 및 삶의 질 기여라는 3대 핵심 질문을 던지면서 미국 혁신의 새로운 황금기를 맞았다고 선언했다. CET는 양자, 핵융합, 우주, 생물 같은 미래전략기술을 말한다. 한마디로, 여기서 주도권을 잡고 과학창업을 장려해 나라도 국민도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창세기 임무(Genesis Mission)와 과학기술의 AI 혁신(AI4Science)을 예고했다. 창세기 임무란 미국 에너지부(DOE) 중심으로 생명공학, 차세대에너지, 양자정보과학 등 6대 전략분야에서 AI가 과학연구 속도를 가속시키는 파운데이션 모델 구축 등 구체적 추진 체계를 말한다.

또 과학연구 자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메타사이언스(Meta-Science/Science of Science)도 정책 전면에 도입했다. 그 목표는 연구 생산성을 단순 '비용 절감' 아닌 방향성, 재현성, 검증체계, 연구결과의 강건성(Robustness)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협력 가능한 우호 국가들과 글로벌 기술동맹 및 블록화를 추진하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AI, 양자 등 전략기술 분야에서 한국, 일본 등 우방국과의 기술동맹을 체결하고, 파트너십의 양적 확대보다 주도권과 결합 강도를 중시하는 기술 생태계 블록화를 진행하려는 것이다. DOE 제네시스 미션 기반의 미·일 국제 파트너십 및 17개국이 참여한 '교토 비전'이 대표적이다. 이를 기술 공동번영 거래, TPD(Technology Prosperity Deal)라고 부른다.

미국 등 선진국이 이처럼 과학 대혁신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지식생산 체계의 전면적 디지털 전환(DX)과 도메인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 구축이다. AI가 이끄는 연구 가속화의 핵심 동력은 고품질의 과학기술 데이터와 이를 학습한 과학 특화 파운데이션 모델이다. 단순한 챗봇 도입이나 서류 자동화 수준에 머무는 AI 활용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실험실 전체를 사람 손을 거치지 않는 자율 실험실로 전환해 연구 데이터의 오염을 막고, 소재·바이오·반도체 등 대한민국이 독보적 암묵지와 실증 경험을 보유한 제조·실험 분야에서 도메인 특화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집중 육성해야한다. 이를 검증하고 재현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공유 인프라 조성도 병행되어야 한다.

둘째, 정부 역할을 단순 예산지원에서 통합 설계로 재조정하는 일이다. R&D 예산을 단순히 개별 사업 단위로 쪼개어 나눠주는 관리자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가적 난제와 안보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자원과 역량을 결집하는 통합 설계자로 올라서야 한다. 이를 위해 지출 평가 제도를 도입해 사업 예산 중심이 아닌 기능적·전략적 관점에서 재원을 배분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적·재정적 변동성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 R&D 예산 준칙을 확립해 예측 가능한 장기 투자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예비타당성조사 폐지 등 기획의 속도를 높이는 조치와 함께, 명확한 미션 중심의 목표 설정을 제도화해야 한다.

셋째, 기존 시스템을 지키는 '본토(95%)'와 파격적 도전을 허용하는 '섬(5%)'의 양대 축을 구성하는 것이다. 모든 연구를 실패율 0%에 맞춰 관리하는 현재의 합리적 평가 시스템은 세상을 바꿀 파괴적 아이디어를 스스로 제거한다. 기존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95%의 안정적 R&D(본토)는 효율적으로 유지하되, 아무도 가보지 않은 난제에 도전하는 5%의 파격적 혁신 트랙(섬)을 완전히 분리, 신설해야 한다. 미국 국방고등계획국(DARPA)처럼, 이 혁신 트랙에는 정권 교체나 정책 변화에 흔들리지 않도록 최소 10년 이상의 독립적인 법적 보호, 단연도 총액 예산권, 그리고 PM(프로젝트 매니저)에 대한 파격적인 자율성과 권한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실패가 기본값인 고위험·고수익 연구환경이 조성되어야만 AI 시대의 게임체인저가 탄생할 수 있다.

넷째, 출연연의 연구과제중심제(PBS) 폐지 후 미션 재정립과 글로벌 연구 안보체계 가동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PBS 폐지 흐름에 맞춰 각 기관은 관성적인 연구 수탁에서 벗어나 국가 전략 미션에 특화된 차별화된 역할과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부처 역시 출연연의 역량을 반영한 정교한 미션 기획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아울러 학령인구 감소 시대에 대응해 보이지 않는 인재 유출을 막고 AI·도메인 융합 인재를 양성하자. 마지막으로 미국 등 기술 동맹국과의 주도권 있는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 및 연구 안보와 공정한 데이터 개방 법제를 신속히 정비해야 한다.

질문이 좋은 연구를 만들고, 좋은 제도가 그 질문을 살아남게 만든다. 지난 60년이 '실패를 줄이는 제도'의 역사였다면, 향후 60년은 'AI로 연구를 가속화하고, 거대한 실패를 견뎌내며, 세상에 없던 판을 새로 짜는 제도'의 역사여야 한다. 우리나라 R&D 시스템의 대대적인 재설계만이 AI 시대 글로벌 기술패권 전쟁의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 노성열 논설위원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을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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