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법 기술자' 김기춘 서훈 취소될까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5-27 16:53:40

[김덕련의 역사산책 51] 고문에 의한 간첩 조작과 훈장
법무부, 검사 서훈 공적 사유 최초 전수 조사 착수
김기춘 등이 1973년에 받은 훈장이 우선 검토 대상
'훈장 넷' 김기춘, '역대 최악' 유신 헌법 탄생 관여
'고문·조작' 1975년 11·22사건과도 뗄 수 없는 관계

법무부가 1955년부터 71년 동안 검사와 수사관들에게 수여된 훈·포장과 표창 2만여 개의 공적 사유에 대한 전수 조사에 지난달 착수한 사실이 25일 알려졌다. 과거 독재 정권 시기에 고문, 간첩 조작 공로로 포상을 받은 검사들의 서훈을 취소하기 위한 최초의 전수 조사다. 상훈법 등에 따르면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 훈·포장과 표창을 취소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 전 의원, 박희태 전 국회의장 등이 1973년에 받은 홍조근정훈장이 법무부의 우선 검토 대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1972년 유신 헌법 기초에 참여한 공로로 수여된 훈장이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24년 10월 24일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상득 전 국회 부의장 빈소 조문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우선 검토 대상 명단에 김기춘 이름이 오른 점이 눈에 띈다. 김기춘은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 중 하나인 '검찰 공화국' 구축의 주역으로 꼽힌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법 기술자, 법을 악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는 법비(法匪)라는 비판을 받는다.

 

김기춘은 대한민국 검찰의 상징적 인물이다. 경남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노태우 정권 시절 검찰총장(1988~1990)과 법무부 장관(1991~1992)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했다. 1992년 대선에서 노골적인 지역감정 조장 공작을 모의한 초원복집 사건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김기춘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유신 헌법을 만드는 데 관여한 것이다. 유신 헌법은 한국의 역대 헌법 중 최악이었다. 3권 분립 부정, 대통령이 긴급 조치권을 활용해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장, 사실상 박정희 한 사람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 등 문제투성이였다.

구속 적부심 제도를 폐지하고,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처벌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인권 침해를 줄일 수 있는 요소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유신 독재 시기에 고문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이 빈발한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안이다.

유신 헌법 탄생 과정에서 김기춘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헌법학자 한태연은 2001년 한 학술 대회에서 유신 독재의 문을 연 비상계엄 선포 이튿날인 1972년 10월 18일 청와대에 불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지시를 받고 법무부에 가서 유신 헌법을 만드는 일을 도운 상황에 대해 얘기했다.

유신 헌법의 핵심 내용을 구상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고 신직수 법무부 장관과 법무부 소속 김기춘이 그 뜻을 받들어 안을 만들었다는 것이 한태연의 주장이다. 유신 헌법안을 만든 주동 인물 중 한 사람이 33세의 젊은 검사 김기춘이라는 얘기다. 한태연은 당시 또 다른 헌법학자 갈봉근과 함께 법무부에 가보니, 신직수와 김기춘이 주동이 돼 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고 신직수가 "골격은 손댈 수 없다"고 해서 자신들은 자구 수정 정도만 했다고 증언했다.

한태연과 갈봉근은 유신 독재를 법률로 뒷받침한 사람들이다. 한태연은 2001년에도 "(19)70년대를 무사히 넘긴 것은 유신의 덕"이라고 강변했다. 그런 한태연이 적어도 유신 헌법을 만드는 과정을 주도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고 해명한 것이다.

2001년 국회의원이던 김기춘은 한태연의 주장을 부인했다. 1972년에 평검사였던 자신이 한 일은 "프랑스에서는 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 권한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 등에 대해 조사하고 스터디해 보고하는 정도"였다고 반박했다.

이처럼 주장이 엇갈리지만, 여러 자료를 놓고 볼 때 김기춘이 유신 헌법과 관련해 적어도 자신이 해명한 것보다는 훨씬 비중 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첫째, 김기춘이 유신 헌법 탄생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임을 말해주는 자료는 한태연 증언만이 아니다. 유신 독재 체제 수립 과정을 탐구한 여러 기자의 책에도 한태연 증언과 맥이 닿는 내용이 나온다. 김기춘 등이 실무를 맡은 팀이 유신 헌법, 새 법령 및 포고령 정비를 모두 준비했다고 서술한 경우도 있다.

둘째, 2009년에 발간된 회고록에서 김기춘 본인이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2년 9월경이며 그때 유신 헌법 관련 외국 자료를 연구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유신 독재 체제 수립 준비는 박 대통령이 철통같은 보안을 강조하며 비밀리에 진행한 작업이었다. 김기춘 말대로라면 박 대통령이 그 작업에 깊이 관여하지도 않은 평검사를 불러 직접 보고하게 했다는 것인데, 그건 상당히 어색한 설명이다.

셋째, 비상계엄 선포 후 김기춘은 "TV에 나와 명해설"을 해 이름이 났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유신 헌법 홍보 작업에 관여했다. 유신 헌법을 만드는 데 깊이 관여한 사람에게 해설과 홍보를 맡겼을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넷째, 유신 독재 수립 후 첫 번째로 이뤄진 1973년 4월 대규모 검찰 인사에서 김기춘이 법무부 인권옹호과장 겸 서울고검 검사로 발령을 받았다는 점이다. 무려 네 기수 위 선배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서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김기춘 등이 "유신 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됐다고 보도됐다.

유신 헌법을 만드는 작업에 관여한 것 외에도, 김기춘은 유신 독재 시기에 발생한 '고문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 중 하나인 1975년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과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해 11월 22일 세간에 공개돼 11·22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을 터트린 것은 중앙정보부였다. 이 사건에서 간첩단 주축으로 주로 지목된 사람들은 일본에서 유학 온 교포 학생들이었다. 이들과 가깝게 지낸 대학생들도 사건에 휘말렸다.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서 이 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 당국자가 기자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서 유신 독재 반대 움직임을 색깔론으로 매도하는 일문일답이 실렸는데, 그 당국자가 바로 "중앙정보부 김기춘 국장"으로 명시돼 있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김기춘의 대표작으로 거론된다. 1990년 김기춘이 5·16민족상재단에서 수여하는 5·16민족상(안보 부문)을 받게 됐을 때 신문에 수상자의 주요 '공적'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했다.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된 이 사건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2010년대 들어 재심을 청구해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우리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한 게 바로 김기춘 씨"라는 피맺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사건 이듬해인 1976년 김기춘은 또 하나의 훈장(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때(1987년 황조근정훈장)와 노태우 정권 때(1990년 청조근정훈장) 수여된 것까지 합하면 김기춘이 받은 훈장은 총 4개다. 박근혜 정부 시절 벌어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1심 재판부가 2017년 김기춘의 감형 사유 중 하나로 이 훈장들을 제시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독재 정권 시기에 빈발한 고문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 관련자 중 62명의 서훈이 2018년 이후 취소됐다. 거기에 검사는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검찰 공화국'의 폐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풀이된다. '검찰 공화국' 구축의 주역인 김기춘을 위시한 역대 검사들의 서훈 공적 사유에 대한 이번 전수 조사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지 지켜볼 일이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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