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몽골에서 독립운동과 의료 활동 병행…의열단 가입
'백정 아들' 박서양도 최초 면허 의사…만주서 의료·교육 활동
배우 하영의 증조부인 의사 안상호의 친일 행적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논란은 안상호와 비슷한 시기에 서양 의학을 공부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산 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친일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한 의사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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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김필순, 이태준, 박서양. 독립 유공자이자 의사였던 이들이다. [공훈전자사료관 홈페이지 갈무리] |
그중 3명의 삶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 만나볼 사람은 김필순(1878~1919)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김필순은 1895년 서울로 올라와 교육을 받게 된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899년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인 제중원에 들어가 선교사 통역, 의학 서적 번역 등의 일을 했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이때 김필순을 비롯한 7인의 졸업생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받으며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됐다.
세상과 담을 쌓고 의학만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의학교에 다닐 때부터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동갑내기인 도산 안창호와 결의형제가 됐다. 김필순은 안창호가 1907년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일원이 됐다. 안창호는 김필순 집안에서 운영한 김형제상회에서 신민회 업무를 봤고, 김필순 집은 구국운동가들의 논의 장소로 활용됐다.
신민회는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는 이듬해 105인 사건을 조작해 반일 성향 인사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핵심 표적은 신민회였다.
1911년 12월 31일 김필순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한국인이 많이 이주했지만 근대적 의료 기관이 없던 서간도 통화현에 병원을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한국인들을 치료했다. 그러면서 이동녕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도 힘썼다.
김필순이 치료한 사람 중 한 명이 신흥무관학교 설립 주역인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다. 이은숙의 수기를 보면, 이은숙이 1913년 마적의 습격을 받아 어깨 관통 총상을 입었을 때 김필순이 왕복 24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서 치료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필순은 1916년 북만주 지역인 치치하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진료소를 개설해 의료 활동을 펼쳤고, 땅을 매입한 다음 한국인들을 이주시켜 농사짓게 하면서 독립운동 기지의 기반을 다지려 했다. 그러던 중 1919년 9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일제에 의한 독살을 주장했지만, 사망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97년 김필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김필순만이 아니라 여동생 김순애(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부인)도, 조카(김필순 형의 딸) 김마리아도 독립 유공자다. 김필순의 딸 김위와 김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아들 김염은 1930년대 상하이에서 '영화 황제'로 불리며 중국 영화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두 번째로 살펴볼 사람은 경남 함안 출신인 이태준(1883~1921)이다.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다섯 살 위인 김필순의 제자이자 후배였고, 벗이기도 했다.
의학교 재학 시절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 외곽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의학교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중 1912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했다. 직접적인 망명 계기는 김필순과 마찬가지로 그 전해에 터진 105인 사건으로 인한 검거 선풍이었다.
1914년 난징을 떠나 몽골 고륜(오늘날 수도인 울란바타르)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김규식 등과 함께 몽골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 군관학교를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금 문제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태준은 고륜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고 몽골인들에게 근대적 의술을 폈다. 동의의국은 큰 성공을 거뒀다. 이태준은 몽골 국왕을 비롯한 수많은 몽골인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919년 몽골 국왕으로부터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다.
이태준은 그런 과정을 거쳐 확보한 기반과 재력을 독립운동을 위해 썼다. 고륜과 중국 허베이성 장자커우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고,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도 자금을 지원했다.
1920년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 쪽에서 보낸 한국 독립운동 지원용 금괴를 상하이로 비밀리에 옮기는 작업에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이태준은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의열단의 고민거리 중 하나는 사용하는 폭탄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태준은 '마자르'로 불리며 몽골에서 활동하던 헝가리인 폭탄 제조 기술자를 의열단에 소개하기로 하고, 고륜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러시아혁명에 반대해 볼셰비키 세력과 내전을 벌인 백위파 군대 중 하나인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부대가 1921년 2월 고륜을 점령하고 살육을 자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태준도 목숨을 잃었다. 이태준이 살해된 후 '마자르'는 홀로 베이징에 가서 김원봉과 접촉하는 데 성공하고, 의열단에 질 좋은 폭탄을 공급하게 된다.
1990년 이태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2001년에는 울란바타르에 이태준기념공원이 준공됐다. 이태준은 오늘날 한국과 몽골의 친선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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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을 국빈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0일(현지시간) 울란바타르 이태준기념공원 내 기념관에서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
세 번째로 만나볼 사람은 서울 출신인 박서양(1887~1940)이다. 박서양은 1898년 독립협회가 주관한 관민공동회에서 인상적인 연설을 한 백정 박성춘의 아들이다.
백정은 조선 사회에서 오랫동안 최하층으로 여겨지며 천대를 받았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기는 했지만, 백정 출신에 대한 천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박서양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의료인의 길을 걸어갔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김필순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가 됐다. 졸업 후에는 모교 교수로 일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의학교에 재학 중일 때부터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황성기독청년회에서 학생 교육을 담당하며 계몽 운동에 동참했고 중앙학교, 휘문학교, 오성학교 등에서 화학과 생물학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박서양이 백정의 아들임을 문제 삼자 박서양은 "내 속에 있는 오백 년 묵은 백정의 피만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917년 박서양은 만주로 이주해 간도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구세병원을 개업했다. 또한 기독교 장로교 계통의 초등 교육 기관인 숭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일본의 간도총영사관 측은 1920년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숭신학교를 '불령선인이 건립한 배일학교'(불온한 조선인이 세웠고 일본을 배척하는 학교라는 뜻)로 지목했다.
박서양은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의료 활동을 병행했다. 1921년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임명됐고, 1923년에는 간도교육협회 조직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일제는 이듬해(1932년) 숭신학교에 폐교 조치를 내렸다. 운신의 폭이 좁아진 박서양은 1936년 귀국해 황해도 연백에서 의료 활동을 하다가 1940년 세상을 떠났다. 2008년 박서양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이처럼 친일을 거부한 의사 김필순·이태준·박서양의 삶은 의료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당대만이 아니다.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오늘날 의료계도 되새겨볼 만한 선배들의 삶이 아닐 수 없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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