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은 어딘가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 2026-06-26 14:31:47

'시간의 3부작' 완결 장편 '시간의 감촉' 펴낸 은희경
노년의 자매가 뒤돌아보며 오해에서 이해로 나아가는
깊은 사유와 아포리즘 돋보이는 기억의 재편집 여정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초보자, 삶은 늘 초행"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시각에서 그때의 정서로 추측하고 편집할 따름이다. 다른 이가 같은 공간에서 체험한 일이라 하더라도 누가 편집했느냐에 따라 달리 기억되기 마련이다. 기억하는 일은 시간을 재편집하는 일인 셈이다. 이러한 기억의 속성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태도로 그 시간들을 편집할까. 

 

▲ '시간의 3부작' 완결편을 내놓은 은희경. 그는 "한 사람의 몸에 담긴 시간과 공간과 사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썼다. [문학동네]

 

은희경이 펴낸 신작 장편 '시간의 감촉'(문학동네)은 노년에 이른 자매가 성장기에서부터 흘러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기억을 편집하면서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자신들의 생과 화해를 도모하는 사유의 여정을 담고 있다. 출세작 '새의 선물'과 청춘기를 담은 '빛의 과거'에 이어 이른바 '시간의 3부작' 완결을 표방한 이 장편은 시간의 흐름을 견뎌낸 노년의 육체와 그 안에 쌓인 기억들을 담백하고 다정하게 편집해 나간다.

노년에 접어든 대조적인 두 여성, '경선'과 '안나'가 중심축이다. 경선은 '환대의 시선'을 갈구하는 나르시시스트적 이상주의자다. 어릴 때부터 타인의 관심을 끄는 법을 배웠고, 세상이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안나는 '고립의 차양' 아래 숨어 지내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이자 관찰자다. 그는 세상에 섞여들지 않은 채 방어적으로 거리를 두고, 스스로의 그늘 속에 머물기를 자처한다. 

 

이들은 서로를 오해하고 비판하면서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상대방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경선의 딸 다은과 손녀 다니엘이라는 미래 세대는 자매의 연대와 교감을 촉진하는 매개체가 된다. 


-시간을 복기하고 재편집하는 일은 어떤 의미일까?
"이 소설을 시작하고 보니 자꾸만 이전 작품들의 시간이 겹쳐서 떠올랐다. 왜 이렇게 하나의 사건보다 시간의 흐름을 장편으로 쓰는 걸까 생각해 보니, 지나간 시간의 과오나 상처 같은 것들을 재편집해서 인생을 해석하려는 그런 시간에 대한 감각으로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냥 한 번 살지만, 과거의 시간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과거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면, 현재 시점에서 현실을 보는 관점도 조금 바뀐다고 생각한다. 내가 과거를 바꾸지 않으면 현재에 무슨 새로움이 있을까."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끼어 앉아 있는 듯한 거북함.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무의미한 긴장. 남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해서 몸을 웅크릴 때의 한심한 위축감. 안나는 자신이 왜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남들과 섞이는 데에 불편함을 느껴야 했는지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이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는 게 마음에 들 뿐이다.' 

 

안나와 경선은 동갑의 자매이지만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많이 다르다. 안나가 자신만의 고립된 자리에 웅크리는 스타일이라면, 경선은 사람들의 관심과 환대를 욕망하면서도 세상이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양면을 지닌 캐릭터이다. 안나는 국어교사로 은퇴한 독신녀이고, 경선은 불속에 뛰어든 것처럼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P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웠다.

-안나와 경선의 캐릭터가 생생하다. 어느 쪽이 더 작가에 가까울까.
"두 캐릭터 모두 제 안에서 나온 인물들이다. 평소에 살아가는 나는 경선에 가깝고, 소설을 쓰는 나는 안나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안나처럼 삶에 섞이지 못하고 관찰자처럼 방어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은 제 소설에 계속 나왔는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 상태에서 나오고 싶었다. 그래서 다니엘이라는 아이를 통해 미래도 다시 생각해보고 그 고독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유니폼'을 대하는 자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이들 세대는 자기들이 인생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 남성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여성들에게 그러했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무언가 역할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 세대는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경선은 따랐고 안나는 거부했다. 그 세대는 자기 선택 없이 주어진 대로 과제하듯이 살았다는, 그런 얘기다."

'우리 모두는 고통을 겪고 또 해결하면서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변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순간은 어딘가에서 왕국을 건설하고 사계절을 보내고 있다. 내가 생각한 진실과 사랑이 그런 방식으로 지켜져서 훗날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그걸 믿는다면 죽음 또한 소멸이 아닌 시간의 계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선의 죽은 전 남편 P는, 나중에 알고 보니 이혼 전에 약속했던 여행을 위한 통장을 채워 그녀에게 남겼다. '행복의 이데아'를 파괴했던 그 남자에 대한 경선의 배신감은 말미에 이르러 어디에선가 완성된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따뜻한 위안으로 변모한다.

-사랑이 변하고 배신당했다 하더라도 한때의 사랑은 그것대로 왕국을 건설해서 남아 있다는 대목은 따스한 구원이다.
"내가 한 번 사랑했던 감정은 언젠가 도달했던 어떤 고지 같은 곳이다. 높은 산에 한 번 올라가 봤으면 그 풍경을 아는 거 아닌가.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대상과의 관계가 어떻게 됐든 간에, 내가 느꼈던 그 사랑의 고지에서 바라봤던 세상이라는 것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고 여긴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여성 노인 이야기를 쓰려면 무력감과 우울함이 앞섰는데, 이제는 좀 더 담대하고 활달해지는 마음이라고 썼다.
"그동안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늙었고, 당사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나이 든다는 것이 두렵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전부 어둡고 쇠락한 것일 거 같았는데, 소설을 쓰면서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삶을 관찰한 지금의 생각은 그냥 이렇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소멸되는 존재이고, 노화란 그냥 인생의 한 단계일 뿐이다. 노인이라고 하면 인식되는 무력함이나 소통 불가의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다른 나라 소설 보면 노인 주인공들이 자기 방식의 삶을 사는 모습들이 많은데 한국 소설은 노인을 거의 무력하고 편협한 존재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냥 살다 보니 노인의 단계에 이르는 것일 뿐이지, 갑자기 우리가 규정한 노인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는 그런 얘기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 은희경은 "나의 결점이고 나의 한계인 세계를 그대로 써내려가며, 나처럼 기쁘고 슬프고 외로웠던 누군가의 묵인을 원한 것까지가 내가 빌었던 행운"이라고 썼다. [문학동네]

 

-어린 손녀 다니엘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미래세대에 대한 기대란?
"우리 세대는 모든 게 무거웠다. 가족도 그렇고 사회 관계도 그러했는데 지금 아이들은 그렇게 큰 빚이 없다. 우리 세대는 무거운 만큼 어떤 과제가 있었지만, 지금 아이들은 자기 인생을 살아가기가 더 혼란스러운 면도 있다. 자기 방식대로 세상에 접근하는 데 편견이 적고, 할머니들과도 편견 없이 지낸다. 그 아이들이 세상을 억압 없이 새로운 호기심으로 만들어 나갔으면 하는 마음, 그런 희망도 담았다. 노인의 자연스러움과 함께 어린애의 자연스러움도 얘기하고 싶었다."

줄리언 반스나 밀란 쿤데라처럼 에세이 스타일의 아포리즘이 곳곳에 끼어들어 차분한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은희경의 문장들은 찬찬히 곱씹으며 읽는 맛을 돋운다. 은희경은 "그동안 사로잡혀 왔던, 저를 규정하거나 상처 주거나 했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질문을 다 했다"면서 "이제 너무 깊게 내려간 것보다는 조금 스쳐 가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의 몸에 담긴 시간과 공간과 사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미처 다 쓰지 못한 보다 더 육체적인 몸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게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작가의 말.

'공간의 이동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 앉아 있다는 느낌에 자주 사로잡혔다. 우리 모두 오늘이라는 시간의 초보자이고 계속되는 한 삶은 늘 초행이다, 라는 문장도 가끔 떠올렸다. 어떤 나이이든 모든 삶은 발견과 성장의 여정이 아닐까.'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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