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구상한 순서 따라 미발표 9편 포함한 42편과 산문
초기 시의 질감으로 돌아가 '죽음'에 대해 숙고한 흔적
"남편 향한 '연가'가 먼저 떠난 시인의 쓸쓸한 유언으로"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 아직 뭔가를 쓸 수 있는 구십이라는 나이가 나에게 있다면 / 나는 그대의 무엇을 가장 마지막까지 쓸까 / 어느 순간에는 영원 같은 어긋남의 빛이 있어 / 그림들 속에 숨겨진 웃음과 울음은 서로 안아주었다고 / 헐거운 노래를 허밍하며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고/ … / 떠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착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라고 _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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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 전 독일에서 작고한 허수경 시인. 그가 독일인 남편을 간병하며 썼던 시가 자신의 유고시집 표제가 됐다. [난다] |
8년 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난 허수경(1964~2018) 시인의 유고시집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난다)가 출간됐다. 허수경의 생일을 맞아 출간된 이 시집은 노트북 파일 속에 남아 있던 시편들을 그가 생전에 번호를 매기며 구상했던 배열 순서를 좇아 김민정 시인이 고르고 편집했다. 생전에 마지막 시집을 갖고 싶다고 했던 시인의 바람에 따라 미발표 시 9편을 포함해 모두 42편의 시와 3편의 산문, 영문으로 번역한 표제작을 수록했다.
편집자 김민정 시인이 생전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2016)에 수록하지 않고 고인이 따로 보관했던 시편들을 찾아냈고, 이 시편들은 마지막 시집 시편들과는 달리 오히려 초기 시 계열의 질감이어서 나중을 기약했던 것으로 보았다. 오래된 죽음에 대한 시들은 따로 발표하지 않고 모아두기만 했던 것인데, 남편이 아프니까 죽은 아버지와 고향도 생각이 많이 나서 쓴 시편들이었던 것 같다고 김 시인은 전했다.
독일인 남편이 쓰러져 간병을 하는 과정에서 썼던 시편이 표제작이 됐다. 그대가 먼저 가면 구십 살까지 기다렸다가 연시 한 편을 완성하겠노라고 썼는데, 정작 먼저 떠난 자신에게 남기는 유언이 된 셈이다. 1부 '우리 모두 다만 기어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난다'를 여는 시편에서 그는 "어제는 당신이 나를 더 기다렸고 / 오늘은 내가 당신을 더 기다린다 "면서 "나는 이 세상 속,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 사라져간다"고 썼다('공항에서').
살아 있는 동안의 기록 / 읽히지 않고 들릴 때도 있다 // 한 장 한 장 / 오래오래 // 시간이 안쓰럽게 우리를 번역하고 있었다 / 비 오기 직전 구름 같은 우리의 마음을 / 마음의 생애를/ … / 그러다 언제쯤 / 당신과 나는 누군가가 듣고 있는 / 이 지구에 없는 목소리의 유랑인이 될 거다 / 아무도 건설해본 적 없는 국도를 걷는 아픈 고아, // 꿈꾸는 귀가 듣는 발자국일 거다 _ '듣는 책' 부분
시인은 자신이 비록 지구에 없는 목소리가 되어 유랑할지라도, 남겨진 이들이 슬퍼하지만은 않기를 바란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걷고 있을 터이니, 누구와도 다른 '고아'의 정체성으로 남긴 자신의 목소리를 '꿈꾸는 귀'는 들을 수 있다고 쓴다. 그는 유고시집 말미에 수록된 산문에서 "시인으로서 내 존재는 고아"라면서 "누군가가 나를 태어나게 했고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홀로 남겨진 고아"라고 썼다. 그는 "고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기댈 전통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전통이라는 것에 기대면 스스로를 베끼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위기감 때문"이라면서 "여태껏 누군가가 써오던 시를 쓰면서 시인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묻는다.
그는 예술이라는 것, 특히 시를 쓰는 행위는 현실의 남루를 가리는 기능을 감당하는 것 아닌지 고뇌한다. 찬란한 시를 쓰는 날들을 두고 "박하의 나날이었네, 그렇지 않았니?"라고 자문하면서 '박하의 나날이 지고 누런 호박의 나날이 차오르네'라고 척박한 현실을 돌아본다. 시인은 끝내 어느 주점에서 '모든 별들에게 버려진 태양'처럼, '벌겋게 취한 태양'처럼 운다.

시인은 남루한 현실을 '우주적 울음'으로 번역해냈다. 울음은 시집 곳곳에서 들린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고 일찍이 첫 시집에서 표방했던 이 울음은 '죽은 아기 코끼리 곁에서 곡(哭)을 하는' 코끼리들에서부터 '구멍이 숭숭 뚫린 폐허에서 발견된 오천 년 전의 양뼈와 돼지뼈가 / 아주 오래된 피리소리를 내며 말라' 가는 '하튜사 연가'에서도 보인다.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포도주 한병')는 시인은 "저 벽 아래 누군가 울고 있는데 /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군가 울고 있는데"라고 탄식하면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누구는 / 울 자리도 빼앗기겠지"('꽃 지는 날')라고 안타까워한다. "서럽게 윤이 나는 눈꼬리에 맺힌 눈물 / 그 눈물을 닦는 베개 모서리에서 나는 냄새"를 언급하는 '손금'에 이르면, "따스함이 쓴 쓸쓸의 안경"은 "서럽고 따뜻하고 흐릿하다."
인간의 손금이라는 말을 들으면 쓸쓸해진다 / 아, 독일인 내 남편은 알까 싶어 손금, 알아요? 라고 물으면 / 빙긋 웃는 그의 손금 위에도 쓸쓸함 그리고 따스함이 언 서리꽃길처럼 있다 // 쓸쓸하지 않은 따스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 따스한 쓸쓸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 따스함이 쓴 쓸쓸의 안경 / 서럽고 따뜻하고 흐릿하다 _ '손금' 부분
2부 '울지 마, 우리는 동무잖아'에 이어 3부 '이제 시 아닌 다른 겹의 시간에게'는 시인이 이국의 땅에서 모국어로 마주해야 했던 시대의 거대한 트라우마와 사회적 참사에 대한 애도로 나아간다. '누군가 물었다'에서는 세월호 참사의 참담한 비극을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동양 여인의 시선으로 정면 응시한다. 이웃들이 "당신의 고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라고 물을 때, "나도 모른다, 고 말하는데 / 눈물이 났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이성적 이해 이전에 몸이 먼저 공명한 슬픔의 징후다. 난민들의 울음소리를 밤새 안아 통과시키는 '흰 호텔 2016년' 역시, 타향에서 고아처럼 살아가면서도 지상의 억울하고 가냘픈 모든 생명을 기억하고 울어준다.
김민정 시인이 독일에서 진행된 수목장을 마치고 돌아설 때 장례지도사가 뛰어와 '허수경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세 알을 쥐어주었다고 했다. 정작 아직까지도 국내에서는 서류 미비로 고인의 사망신고 처리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 김 시인은 서둘러 유고시집을 낸 뒤, 도토리와 국내 시인들의 추모글을 달항아리에 담아 올 가을 기일에 허수경 고향 진주에서 나무 아래 묻을 계획이다. 이번 시집에는 허수경이 고향을 떠올리는 '진주라는 곳'이 수록됐거니와, 김 시인이 진주에서 허수경을 기리는 기획을 하게 만든 시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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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수경은 "따스한 쓸쓸함을 당신은 보셨는가?/ 따스함이 쓴 쓸쓸의 안경 / 서럽고 따뜻하고 흐릿하다"고 썼다. [난다] |
지중해에서 잡혀온 고등어를 시장에서 본 순간 / 독한 소금을 품고 있는 장독 생각이 났어요 //…// 이방의 시장 안 얼음 위에 누운 고등어가 장독이 되고 / 짠 얼음이 되고 짜디짠 가을빛이 되는 거 // 그 짠 것을 먹고 또 먹어보고 싶은 이런 건 / 시방 내가 질기게 꾸는 꿈 같아요 // 저렇게 푸르고 붉은 채소와 과일 사이에서 / 고등어만 바라보고 있는 쓴 나날 같아요 / 질긴 소금의 살 속에 들어가 울고 있는 햇살 같아요 _ '간고등어'부분
지중해에서 잡힌 고등어를 보고 고향의 '간고등어'를 떠올리며, 시인이 자신의 심정을 "질긴 소금의 살 속에 들어가 울고 있는 햇살"에 투사하는 대목은 "짜디짠 가을빛"처럼 서럽다. 몸은 지구를 떠났지만 시인의 육성은 내내 누군가의 '꿈꾸는 귀'에 들릴 테니, "그녀의 시를 듣는데 다시 슬퍼져 도통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마르고 있는 저 빨래를 걷으러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을 다시 그려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가 걸린 하늘을 다시 디뎌볼 수 없을 것 같아"('그녀가 들려주는 시')도, 한번 견디어볼 일이다. 마지막 '시인의 말'.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쓸 것인가?"// 이 모든 시간을 다 합하여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예!"// 하고 저는 답할 것입니다. _ 2018년 6월 28일, 허수경.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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