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비극과 슬픔, 깊이 들여다보고 재가공하는
소설의 윤리 흥미롭게 담아낸 표제작 포함 7편 수록
우회하는 시선으로 유머 담아 어두운 현실을 묘파
"연민과 연대만 있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소설은 이야기에 불과한가. 실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옮겨 적어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소설에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흔히 "소설 쓰고 있네"라며 조롱하듯 말하는 그 '소설'을 소설로 되묻는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은 고은규 소설집 '이것은 소설인가'(교유서가)가 출간됐다. 첫 소설집 '오빠 알레르기' 이후 10년 만에 묶은 두 번째 소설집으로, 인물들이 빚어내는 아이러니를 품은 단편 7편이 단숨에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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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 집필에 전념하다 오랜만에 단편 모음집을 펴낸 고은규. 그는 "사적인 상실과 부채감은 내가 만난 적 없는 인물과 경험하지 않은 사건 안에서 살아날 것"이라고 썼다. [작가 제공] |
나쁜 남자들을 저격하는 이야기는 표제작에서 시작해 '묻는 남자'와 '긁지 마, 제인'으로 이어진다. 표제작은 학원 강사로 일하며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 관철의 이야기다. 그는 10년 전 자신의 습작을 문학상에 투고해 덜컥 당선시켜 준 뒤 사라졌던 동기 나미 소식을 듣는다. 나미는 자신의 블로그 '이것은 소설인가'에 과거 그녀에게 성폭력과 스토킹, 2차 가해를 일삼았던 동문들의 만행을 저격하고 있다. 나미가 거절한 초판본을 몰래 가져왔다가 돌려주지 못했고, 다시 그 책을 빌려간 상대에게서 어렵사리 초판이 아닌 새 책을 돌려받은 관철도 묻는다. '이것은 소설이 될 수 있을까'.
'묻는 남자'는 불법 촬영 성범죄의 트라우마로 얼굴을 성형하고 이름까지 바꾸며 숨어 사는 여성 수영의 일상을 다룬다. 옆집으로 이사 온 남자는 마주칠 때마다 "미림여고 나오지 않으셨나요?"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디지털 시대 성범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실감하게 한다. 반복되는 '미림여고' 질문은 따라 읽는 이들조차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할 정도다.
'긁지 마, 제인'은 이상 기후의 폭염 속에서 에어컨 실외기들이 연쇄 추락하는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유부남 팀장과 사귄 지 180일째부터 원인 모를 피부 질환을 앓으며 단약(斷藥) 부작용에 시달리는 제인은 끊임없이 피부를 긁어대고, 진물이 묻은 잠옷을 수시로 갈아입는다. 제인은 이웃들의 원성을 사던, 자신의 환부를 상징하는 실외기를 지상으로 밀어 추락시킨다. 주체적인 삶을 향한 결단이다.
'어느 로프공'은 한국전쟁 직후 지어진 노후 아파트 '랑데부'의 불법 증축된 5층에 사는 빈민들의 수직적 우화다. 아래층 합법 거주민들은 5층 사람들의 중앙계단 이용을 막아버리고, 외부 유튜버들은 철제 비상계단으로 침입해 이들의 비참한 삶을 라이브 방송으로 중계한다. 주민들은 계단을 뜯어낸 뒤 전직 로프공인 7호 아저씨가 만든 달비계, 즉 '인간 엘리베이터'에 의지해 오르내린다. 과거 사람을 구하지 못한 일을 속죄하는 심정으로 인간 엘리베이터 역할을 하는 남자 이야기가 흥미롭다. 한국사회의 편 가르기와 배타적 관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수작이다.
'누가 잠을 자고 누가 깨어 있는가'는 대한민국 최고가 아파트 '더 퍼스트 프레스티지'에서 야간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작가 지망생 소희의 서사다. '너의 집이 좋아'는 15년간 15번 이사한 끝에 외곽의 신축 빌라를 대출받아 분양받은 여성의 이야기. 전세 사기 여파와 미분양으로 단지 전체는 불 꺼진 '검은 마을'로 방치되고, 건물에 유일하게 입주한 주인공은 짙은 공포에 시달린다.
'이별을 그딴 식으로 하는 사람'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한 동희가 연인 윤오에게 선제적으로 이별을 고하고 그가 기르던 고양이 '자바'를 데리고 잠적한 회한을 담았다. 새 연인 승운을 만났으나 자바의 공격으로 관계가 삐걱거리자 윤오에게 고양이를 돌려보내려 연락하지만, 이미 윤오는 세상에 없다. 먹먹한 연애 스토리이자, '누구든지 살아남아 달라'고 하소하는 따스한 단편이다.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사회 문제를 드러낼 때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성폭력, 성착취 문제도 처음부터 직격하는 게 아니라 낯선 이웃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다 읽고 나서야 이게 성폭력 문제라는 걸 알게 되는데, 직접적이기보다 우회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목표는 같더라도 조금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나미의 블로그는 소설인가.
"아니다. 그것은 나미가 과거에 겪은, 사과받지 못한 일을 블로그에 저격한 것이다. 나미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지만 피해자건 가해자건 그 사건을 읽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봐주길 원했다. 그래서 병을 옮긴 남자와 스토커의 만행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썼다. 2차 가해를 한 사람은 더 가열차게 비판받아야 된다는 의도로 1인칭 시점으로 쓴 것이다."
-소설인지 아닌지 나누는 기준은?
"모든 게 소설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구체적이든 모호한 것이든 다 소설이 될 수 있다. 제 폴더에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사적인 이야기는 별로 없다. 어느 날 짧은 소설을 청탁받았는데, 있었던 일을 그냥 훅 써버린 적이 있다. 그때 스스로 놀랐고, 저 자신에게 어떤 제동을 걸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의 죽음이든 사회적으로 심각한 비극이든, 그것을 어떻게 재가공하고 더 깊이 있게 고민하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소설은 타인의 비극과 슬픔과 죽음, 이런 것들을 함부로 갖다 쓰지 않고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정제하고 재가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동차 트렁크를 집으로 삼았던 장편 '트렁커'에서부터 이번 소설집의 신축 빌라와 오래된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집'이라는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집은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어야 한다. 밖에서 일을 하고 문을 닫고 들어오는 순간, 전쟁터에서 퇴각하듯 바깥과 완전히 단절돼야 한다. 그래야 충분히 휴식도 취할 수 있고 상처받은 마음도 덧나지 않을 수 있다. 가족 사이에 다정한 말이 오가며 각종 오염으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안도감이 느껴지는 집이 이상적인 형태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 일이 태반이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저는 집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집이라는 공간에 특히 예민한 것 같다."
-어두운 이야기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제가 그렇게 웃기는 사람은 아니다. 실제로 저를 만나본 사람은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재미있고 웃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듣는 편이고 잘 웃어주는 편이다. 무거운 주제를 무겁게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썼고, 정작 제가 쓰다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대목은 아무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인물들이 알아서 서사를 개척해나가는 것 같다. 결국 설정과 인물의 힘인 셈이다. 제 경우 웃기는 소설은 대개 인물들이 젊다."
-수면을 팔아서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 글을 쓰는 이야기에는 작가의 지난 시절이 투사된 건가.
"19세기 노동자들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 촛불을 켜고 시를 썼다는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접하면서 울컥했다. 10년 동안 생업을 병행하며 36만 자를 썼던 제 경험도 투사됐지만, 야간 배송뿐 아니라 2교대, 3교대를 하는 21세기 노동자들이 19세기 노동자만큼이라도 예술적·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인지 의문이 들었다. 제 주변에는 일하면서 강의하는 것 말고 몸으로 노동하면서 글 쓰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이 이 소설을 보면 많이 공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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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에서 주로 집필하는 고은규의 소설에는 '집'이라는 공간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작가 제공] |
고은규는 지난 10년 동안 단편 청탁을 일곱 번 받았다며 이번 책이 마지막 단편집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단편은 청탁을 받으면 쓰지만, 장편은 벽을 바라보며 고독하게 나아가는 작업 같다고 했다. 청소년 소설 한 편을 막 끝냈고, 고급 요양원을 무대로 노인 문제를 다룬 스릴러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물음에는 예전엔 남을 위해 쓴다고 했지만, 이제는 먼저 자기 존재를 탐구하려고 쓴다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소설로 배우며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이번 소설집 마지막 작품은 존 트래볼타가 춤을 추던 '스테잉 얼라이브'(Stayin' Alive)로 맺었다. 그는 이 노래를 맨 끝에 배치한 이유에 대해 "우리가 연민과 연대, 이 두 가지만 품고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회한과 미련과 연민과 분노조차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 살아남아야 한다, 이별은 그딴 식으로 했어도.
누구든 간에, 형제든 어머니든, 살아남고 있어, 살아남고 있지. 살아남아. 살아남아라……. _ '이별을 그딴 식으로 하는 사람'
K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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