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하우 감추는 '반증류.skill' 등장…개발자들의 역습
노동자의 암묵지는 누구 것인가…'노동 데이터' 소유권 논쟁
미국과 함께 인공지능(AI) 최전선 1,2위를 다투고 있는 중국에서 '증류(蒸溜,Distillation)'에 반대하는 사회적 움직임이 일고 있다. 증류라니, 고량주나 위스키를 제조할 때 원재료에서 수분을 증발시켜 진액만 남기는 작업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AI에서 말하는 증류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계 증류, 다른 하나는 인간 증류를 지칭한다.
기계 증류는 원래 지식 증류(Knowledge Distillation)로 불렸다. 크고 성능이 좋은 AI '교사 모델(teacher model)'의 출력과 지식을 더 작고 효율적인 AI '학생 모델(student model)'에 학습시키는 기술이다. 그래서 모델 증류라고도 부른다. 제프리 힌턴·오리올 비냘스·제프 딘이 2015년 발표한 논문이 이 개념을 널리 정착시켰다. 거대한 AI 모델의 능력을 상대적으로 작은 AI 모델에 압축해 비용과 연산량을 줄이려는 기술이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중국의 딥시크 AI가 바로 미국의 오픈소스(개방)형 빅 AI모델을 증류한 경량 모델이다. 트럼프 정부는 중국이 미국의 AI 모델을 증류해 비슷한 성능의 싼 보급형 모델을 만들지 못하도록 수출 규제에 착수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 증류는 기계 증류와는 전혀 다르다. 기계 증류란 큰 기계의 성능을 작은 기계가 수행토록 압축하는 기술이다. 즉, 기계와 기계를 연결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 증류는 말 그대로 인간을 기계 안에 압축시켜 넣는 기술을 말한다. 최근 중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인간 증류, 다시 말해 '동료 증류(蒸馏同事)'는 AI 모델 증류와 다르다. 퇴직자나 동료의 메신저 대화, 이 메일, 업무 문서, 의사결정 습관 등을 AI에게 읽히고 이를 스킬(SKILL.md) 같은 구조화된 소프트웨어 규칙으로 바꾸어 AI 에이전트가 그 사람의 업무 방식과 말투를 재현하게 하는 기술이다. 모델의 파라미터를 새로 훈련하는 전통적인 지식 증류라기보다는 '사람의 암묵지(暗默知)를 AI가 실행할 수 있는 지식 패키지로 변환하는 프로그래밍'에 가깝다.
암묵지는 헝가리의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가 1958년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숙련자가 오랜 경험을 통해 익혔지만 말이나 문서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작업 노하우를 뜻한다. 중국에서 기업이 직원의 경험·결단·인격 자체를 AI 기술로 추출해 대체하는 일이 현실화하자 이번에는 노동자 측에서 반발이 시작됐다. 인공지능이 인간 노동자의 노하우를 착취하고, 자신의 노동을 기계에 뺏기는데 항의하는 사건이 '노동자의 천국' 사회주의 중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AI가 노동자의 암묵지를 추출해 인간을 대체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이 자본주의 첨단국가 미국이 아니라 사회주의 중국에서 먼저 표면화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중국 경제 주간지 '차이신(財新)'은 이 사건을 '반(反)증류 전쟁'이란 제목의 6월호 커버스토리로 대서특필했다.
경과는 이렇다. 지난 3월 개발자 소프트웨어 장터 커뮤니티인 깃허브(GitHub)에 '동료 스킬(Colleague.skill)'이란 논문이 올라왔다. 상하이인공지능연구소의 24세 엔지니어 저우톈이(周天奕)가 불과 네 시간 만에 만든 오픈소스 프로젝트였다. 개발 취지는 퇴사자와 함께 사라지는 팀의 지식과 경험을 AI가 이어받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연구 논문은 인간 전문가의 흔적(trace)을 재사용 가능한 AI Skill 패키지로 바꾸는 '전문가 지식 증류(expert knowledge distillation)'라고 설명했다. 회사를 떠난 직원의 채팅기록·업무문서·이 메일 등의 자료와 이직자의 성격·습관·소통 스타일을 입력하면 그 직원의 모든 디지털 기술을 추출하는 것이다.
산둥(山東)성의 한 게임·미디어 회사가 퇴사 직원의 데이터로 AI 디지털 직원을 만들었다는 뉴스까지 보도되면서 논쟁은 기술계 밖으로 번졌다. 다만, 해당 회사는 직원의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했고 당시 AI의 능력 역시 제한적이었다. 중국에서 이런 인간 증류는 철광석에서 불순물 제거 후 쇠를 뽑는 과정과 닮았다고 해서 '제련 당했다(練化)'라고도 표현한다. 하지만 동료 개발자 기술까지 복제해 일자리를 줄이자 베이징의 AI 제품기획자 덩샤오쉬안(鄧小閑)은 분개했다. 덩은 "AI 활용은 좋지만 내가 수년 동안 축적한 핵심 경쟁력까지 회사가 가져가 AI 에이전트로 대체하는 게 과연 정당한 행위인가"라며 반발했다.
곧 자신만의 노하우를 감추는 '반(反)증류.skill' 코드를 만들어 깃허브에 공개했다. 회사가 직원에게 자신의 경험을 Skill로 문서화해 제출토록 강제할 경우, 진짜 핵심 노하우는 빼고 겉보기에 전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반론만 남기는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개발자들은 열광했다. 현재 공개된 Anti-Distill 프로젝트는 실제로 핵심 정보를 '맞는 말이지만 쓸모없는 표현'으로 바꾸고, 삭제한 경험과 판단법은 별도의 개인용 파일에 보존하도록 설계돼 있다. 말 그대로 AI와 AI의 노동쟁의이다.
이제 논란은 'AI로 동료를 흉내 낼 수 있느냐'에서 '직원이 회사 생활로 쌓은 경험과 판단력의 소유자는 누구인가'라는 노동·재산권 문제로 이동했다. 7월에는 사건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중국 런민(人民)대 류하이룽 (劉海龍)교수는 '차이신' 기고에서 노동자가 '잉여 노동시간'뿐 아니라 자신을 대체할 기계를 훈련시키는 '잉여 데이터'까지 회사에 넘기는 문제로 해석했다. 다만 그는 현재의 AI 에이전트가 여전히 비용이 많이 들고 중간 수준 인간의 종합적 능력에도 못 미치는 만큼, 최근 열풍에는 상당한 과장도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의 '반증류 운동'은 노동조합 등이 주도하는 정식 사회운동이라기보다 개발자들의 풍자적 오픈소스 프로젝트에서 출발해 노동자의 데이터 권리와 AI 시대의 고용계약 문제를 제기하는 온라인·직장 문화운동으로 발전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반증류 바람은 간단치 않다. 제조업 숙련노동자의 암묵지를 공장 휴머노이드 로봇에 이식하려는 피지컬 AI 연구 움직임도 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벌써 숙련공 노하우를 데이터화해 산업 현장의 AI 학습에 활용하기 위해 암묵지를 수집하는 전문 스타트업이 등장하고 있다. 데이터 파운드리 스타트업 바운드포는 올해 1분기 수주액이 전년 동기 대비 5.3배 증가하며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암묵지 수집 사업을 잇달아 수주한 덕분이다. 생산 공장이나 점검수리 센터 등 제조업 현장에서는 명장(名匠)이 소리나 냄새, 당일 분위기 등 경험과 느낌에 의존해 불량을 잡아내거나 정상 운전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런 지식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머릿속 암묵지로 AI가 학습하기 불가능했다. 바운드포는 공장의 영상과 센서 기록, 품질 기준 등을 자체 개발한 데이터 플랫폼을 통해 하나로 연결해 AI가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바꿨다.
기계가 바짝 증류시켜 빼내갈 사람의 노동 노하우가 소프트웨어 개발 같은 정신노동이든, 제조업의 암묵지 같은 육체노동이든 상관없다. 과연 AI 시대에 인간의 경험과 전문성은 누구의 소유이며, 기업은 어디까지 직원의 지식을 자산화할 수 있을까. 쟁점은 노동시간에서 '노동 데이터'로 옮겨가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 단위는 오랫동안 시간이었다. 회사는 노동자의 하루 여덟 시간 또는 그의 생산물을 사고 그 대가로 임금을 지급했다. 디지털 경제에서는 다른 자산이 생겼다. 직원이 일하면서 생산한 데이터다. 메일을 쓰고, 코드를 고치고, 보고서를 수정하고, 고객과 대화하고, 회의에서 의견을 주고받을 때 수많은 디지털 흔적이 쌓인다. 과거에는 대부분 업무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AI가 등장하면서 이 부산물이 '다음 노동자를 만드는 훈련 데이터'가 될 수 있게 됐다. AI가 가져온 변화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자동차 공장의 로봇은 노동자의 팔을 대체했다. 엑셀과 기업용 소프트웨어는 계산과 문서 작업을 대체했다.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는 이제 노동자의 '일하는 방법' 자체를 복제하려 한다.
직원 입장에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나를 대체할 AI를 훈련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AI가 단순히 직원을 도와주는 도구라면 문제가 작다. 하지만 직원에게 자신의 업무를 세세하게 문서화하고 Skill로 만들도록 한 뒤 그 AI를 이용해 해당 인력 자체를 줄인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오늘은 AI에게 일을 가르친다. 내일은 AI와 함께 일한다. 모레는 AI가 내 일을 한다. AI를 잘 훈련시킬수록 자신이 회사에 필요한 이유가 줄어들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인간 증류는 아직 완성된 기술이 아니다. 런민대 유 교수의 지적처럼 아직은 과장된 허풍에 가깝다. 하지만 대비는 해야 한다. 첫째는 고지와 동의다. 어떤 데이터가 어떤 AI 시스템에 들어가고 얼마나 오래 사용되는지 직원이 알아야 한다. 둘째는 경계 설정이다.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와 개인의 말투·성격·관계·개인정보를 구분해야 한다. 셋째는 삭제와 퇴출 권리다. 직원이 퇴사한 이후에도 그의 AI 분신을 무기한 사용할 수 있는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넷째는 경제적 보상이다. 한 사람의 경험을 디지털 자산으로 만들어 수년간 기업이 사용한다면 최초 노동에 지급한 월급만으로 모든 대가가 끝났다고 볼 것인지 향후 논쟁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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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성열 논설위원 |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을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VOX(Voice From Oxford) 한국지부 대표(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 △국가녹색기술연구소 정간물 편집위원(2024~)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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