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은 어떻게 적국 일본의 스테디셀러가 됐나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 2026-10-20 16:41:32
[김덕련의 역사산책 55] '징비록'과 일본
서애선생기념사업회, '징비록' 영문 증보판 발간
'징비록', 1604년경 완성…1695년 일본서 첫 출간
일본 지식층만이 아니라 서민층에게도 잘 알려져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임진왜란(1592~1598년)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료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 직접 남긴 대표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서애선생기념사업회는 지난 16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출판 기념회를 열고, '징비록' 영문 증보판을 지난해 말 펴냈다고 밝혔다. 증보판을 낸 것은 이 사업회에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동아시아연구소와 함께 영문 '징비록'을 펴낸 지 20여 년 만이다. 

 

▲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해 11월 27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 480주년과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 언론 공개회를 열고, 류성룡의 '징비록'을 공개했다. [뉴시스]

 

'징비록'은 이 사업회에서 영문판을 발간하기 전부터 서양인들의 임진왜란 연구에 활용됐다. '징비록'을 인용한 최초의 영문 저술로 윌리엄 조지 아스톤이라는 영국 외교관이 1878년부터 1883년까지 네 차례 발표한 임진왜란 관련 논문들이 거론된다.

아스톤의 논문이 처음 발표된 때는 조선과 영국이 수교(1883년 음력 10월)하기 5년 전이다. 발표 장소는 일본 도쿄였다. 논문들은 도쿄의 아시아협회에서 발행한 잡지에 게재됐다.

조선과 국교를 맺지도 않은 유럽 국가의 외교관이 일본에서 '징비록'을 활용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징비록'이 일본에서 오랫동안, 널리 읽힌 책이라는 점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완성한 시기는 1604년경으로 얘기된다. 김영찬 논문에 따르면, 그로부터 74년 후인 1678년 '징비록'을 인용한 문헌이 일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1695년에는 일본 최초로 교토에서 '징비록'이 '조선징비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일본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원문인 한문에 훈점(한자 옆에 작게 적어 넣은 일본어 읽기 부호)을 붙인 형태였다.

재상이던 류성룡이 남긴 임진왜란 기록이 일본에 유출됐다는 것은 조선 조정에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1712년 조선 조정은 '징비록' 등의 일본 유출을 뒤늦게 금지했다.

유력한 유출 경로로 지목된 것은 역관들의 밀무역이었다. 1719~1720년에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은 기밀이 많이 기록된 '징비록', '간양록' 등이 일본에서 출판된 것을 개탄하며, 역관들의 밀무역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간양록'은 1597년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간 강항이 1600년에 풀려나 귀국할 때까지 보고 겪은 일본 실상을 기록한 책이다.

일본에서 '징비록'은 1695년 첫 출간 이후 스테디셀러가 됐다. 20세기 후반까지 일본에서 간행된 '징비록' 번역본, 영인본 등이 30종이 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읽혔다는 것도 '징비록'의 특징 중 하나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많이 읽힌 조선인 저서가 여럿 있지만, '징비록'처럼 그 내용이 일본 지식층만이 아니라 서민층 상당수에게도 알려진 사례는 드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현상의 주요 배경으로 두 가지가 주목된다. 하나는 임진왜란 관련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일본 사회에 많았다는 것이다.

조선인에게 임진왜란은 있을 수 없는 침략 전쟁이었지만, 적잖은 일본인에게는 오랜만에 이뤄진 자국 군대의 한반도 '출병'이라는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 이전에 일본 정규군이 한반도에서 벌인 마지막 대규모 전투는 663년 백강 전투였다. 663년 당시 왜국은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다가 백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 패하고 물러났다.

적잖은 일본인은 백강 전투 이후 900여 년 만에 다시 한반도에서, 그것도 중국 군대까지 참전한 전쟁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소설류 등 여러 종류의 책이 출간돼 많이 읽힌 이유다. 그런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징비록'이 자국에서 출간되자 많은 일본인이 관심을 가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후 등장한 에도 막부 시기의 일본 출판문화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대규모 상업 출판이 본격화됐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대본소도 확산됐다. 그러면서 서민층이 '징비록'을 비롯한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징비록'이 널리 읽히면서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한시, 소설, 공연 등에서 이 책 내용을 다루거나 '징비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일이 생겼다. 에도에서 발생한 화재를 다룬 소설 제목에 '지난날의 화재를 반성해 앞날의 화재에 대비하자'는 취지로 '징비록'이라는 문구를 포함시키기도 했다.

'징비록'은 일본인들의 임진왜란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순신에 대한 일본인들의 높은 평가도 그러한 영향 중 하나로 거론된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활약상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한 서술 방식을 단순히 '이순신 영웅 만들기' 또는 '이순신을 천거한 자신의 공 내세우기'로 여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부분은 류성룡이 국왕 선조(재위 1567~1608년)를 축으로 한 조선 왕실 등 당대 지배층 상당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임진왜란을 바라봤음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선조 등은 임진왜란과 관련해 무엇보다 명나라의 '은혜'를 강조했다. 조선 혼자서는 대처할 수 없는 위기였고, 명나라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조선은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드러난 왕실과 지배층의 무능함과 정치 실패 책임 등을 덮기 위한 논리로 풀이된다.

류성룡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명나라 군대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조선 측의 주체적 노력이 전쟁 승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각했다. 이순신의 역할을 강조한 서술도 그 일환으로 여겨진다. 류성룡의 이러한 임진왜란관(觀)은 '징비록'의 사료적 가치를 더한다.

△주요 참조=이종각 논문(「일본인과 『징비록』」, 『서애연구』 1, 2020), 정해은 논문(「징비록의 서술 중점과 후대 영향력」, 『국학연구』 46, 2021), 김영찬 논문(「에도시대 『징비록』 판본의 인출과 유통」, 『일본어문학』 95, 2021)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