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의 한계가 임정·무장투쟁…빨갱이 매도는 역사적 오류"
김일성 보천보 전투는 '과장과 운'의 결과…친일 청산 실패가 기득권 고착화
황현필 역사바로잡기연구소장이 자신의 강의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일부 지적에 대해 "아직까지 역사학계에서 단 한 번도 '네 역사 강의에 오류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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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8일 황현필 역사바로잡기 연구소장이 경기도교육청 초청으로 '경기교육대전환 명사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진현권 기자] |
황 소장은 28일 경기도교육청의 초청으로 열린 '항일 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경기교육대전환 10월 명사 특강'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폄훼하면서 친일파를 옹호하는 자들, 분단을 책동하고 통일을 반대하며 독재와 학살을 추종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감히 제게 역사를 '왜곡한다'라고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황 소장은 이어 "제가 왜곡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암살자들'을 왜곡 영화라고 딱 프레임을 짜 놓고 난 다음에 그게 먹히니까 저한테도 왜곡 강사라고 한다"며 "제가 좀 화가 나지 않나. 요즘 반민족 친일 매국 세력, 독재와 학살 추종 세력, 분단 책동 세력 때문에 제가 역사 강의를 하면서도 독립운동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끔 해준 그들에게 요즘 애매모호한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고 덧붙였다.
이날 강연에서 황 소장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과정을 체계적으로 짚어냈다.
그는 "3·1 운동 과정에서 7500여 분이 돌아가셨지만 10만~20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 진짜 거족적인 만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만세 운동이 실패로 끝났다"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3·1 운동의 실패 이유를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그래서 이런 만세 운동이 일어날 때를 대비해서 빨리 독립운동 중심 단체를 만들자. 그게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3·1 운동을 가열 차게 이끌었던 학생 청년 지식인들은 굉장히 많이 다치고 죽은 사람도 학생 청년들이었다"며 "일종의 허무주의에 빠진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우리가 독립을 되찾지 못했어, 우리 독립은 불가능한 건가?' 그때 이들에게는 한 줄기 희망으로 들어온 게 사회주의 사상"이라고 밝혔다.
황 소장은 "학생 청년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그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가열 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여기서 또 커밍아웃을 해야 되겠다. 저도 '자본론' 읽어보고 대체 사회주의가 뭔가 고민도 해봤는데, 저랑 성향이 안 맞는다. 저는 공산주의 싫어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가 했던 건 사실"이라며 "그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사회주의자라고 해서 그들을 소위 빨갱이로 매도하면 그건 진짜 큰 역사적 오류"라고 일갈했다.
황소장은 1920년대 이후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의 궤적을 생생히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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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현필 역사바로잡기 연구소장. [진현권 기자] |
그는 "3·1 운동 연도가 1919년이라는 걸 아신다면, 임시정부 만들어진 것도 1919년이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유명한 무장 투쟁, 바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이 바로 3·1 운동 직후인 1920년에 전개된다"며 "이 홍범도 장군이 1920년 일본군을 유인해 157명을 사살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승리했을 때 연세가 53세이다. 17년 후인 1937년에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 계시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신다. 정말 우리 무장 투쟁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에 한 분"이라며 홍 장군의 헌신을 기렸다.
이어 1930년대 한중연합작전 시기의 투쟁을 조명하며 "지청천의 부대가 동경성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진짜 조선혁명군을 이끌었던 분은 양세봉 장군이다. 압록강변에 위치한 이 부대는 팬티 하나 입고 강물을 넘어 들어가서 일본 주재소, 경찰서 작살 내고 다시 돌아오면 당시 중국인들이 '띵호와' 그랬다. '빤스 부대'라 불렸다"고 전했다.
그는 "솔직히 만주에서는 양세봉만 잡으면 무장 투쟁이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출귀몰했다"며 "일본군의 거짓 정보에 의해 양세봉 장군이 죽었는데, 양세봉의 부하들이 양 장군의 시신을 수습해 가지고 고구려 성벽 밑에 묻었다"고 안타까운 순국 과정을 전했다.
또한 "일본 아이들이 찾아내서 양세봉 장군 목을 자르고 그 시신을 훼손한다. 실제로 이 양세봉 장군이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목이 잘린 상태의 시신이 있는데, 우리 모든 독립운동가를 통틀어서 남북한의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유일한 장군이 양세봉 장군이다. 양세봉 장군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면서 "김일성조차도 양세봉을 차마 밑으로 못 내려놓는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 김형직하고 양세봉이 의형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까 북한에서도 대접 받고 남한에서도 대접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황 소장은 북한 김일성의 항일 이력에 대해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풀어내며, 우상화의 거품을 걷어냈다.
그는 "민생단 사건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음을 당했다. 김일성도 민생단 사건에서 죽기 직전까지 갔다. 거기서 죽었어야지, 왜 운이 좋았냐 하면 자기보다 잘난 사람들이 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젊은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러다 보니까 동북항일연군의 2군 6사 중대장인 김일성이 자기 부하 90명 을 이끌고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면에 잠깐 침투해 오는데, 당시 국내에 있었던 조국광복회 90명이 호응해 줬다고 하는데, 그게 보천보 전투"라고 설명했다.
황 소장은 "보천보 전투는 공무원 시험이나 아예 출제가 안 되고, 수능 교과서에서도 보천보 전투가 빠져 있다. 당당하게 빠져도 되는 이유가 뭐냐면, 아무리 봐도 보천보 전투는 과장됐다. 보천보 전적지는 북한의 모든 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한 번 씩 가야 되는 곳이고 어렸을 때부터 보천보에 대한 그 북한에서는 우상화 과정에서 교육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보천보 전투가 대중에게 크게 각인된 이유는 무엇일까. 황 소장은 언론의 보도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결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동아일보가 보천보 전투가 터지니 1937년도 만주에서 백마 탄 독립군 사령관이 계셨는데, 그 사령관은 지금 안 계시고, 이제 만주에서 독립운동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일까 하고 허무주의에 빠질 때, 누군가가 만주도 아니고 두만강을 넘어서 진격해 왔다"며 "이름도 잘 지어야 된다. 김일성이 좀 뭔가 쉬운 이름이다. 동아일보가 호외 로만 6번인가 7번을 내보낸다. 한방에 스타가 된다. 이때 김일성 나이가 25살이었다"고 지적했다.
황 소장은 "8년 후인 1945년 해방 되자마자 평양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열렸고 10만 명의 인파가 모였는데, 그때 김일성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김일성의 명성을 들었는데 33살 짜리가 앞에 나와 '나 김일성이오' 하니까 사람들이 '저거 가짜 김일성 아니야?'라고 했다"며 "그런데 김일성이 민생단 사건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것도 운이 좋았고, 보천보 전투에서 별로 영양가도 없는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부풀려진 것도 운이 좋았고, 또 하나 운이 좋았던 것은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죽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강연 후반부에서 황 소장은 해방 직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아쉬움과 친일 청산 실패가 가져온 현대사의 그늘을 성찰했다.
그는 "김구 선생님이 1945년 8월 15일 날 대성통곡을 하신다. 기쁨의 통곡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일본이 항복한다고 해방을 맞이하면 안 된다. 우리가 역할을 하지 못하면 다시 강대국의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라며 독립군의 주도적 역할 부재를 안타까워했던 백범의 심경을 전했다.
이어 "친일 청산이 실패하고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 친일파들이 다시 정치, 경제, 학계, 언론에 임하면서 기득권이 되었다. 반성이 없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황 소장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해방 후 철저한 부역자 청산을 감행하며 남긴 인상 깊은 명언인 '이 중에 억울한 죽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프랑스가 외세의 침략을 받을지언정, 이제는 민족을 배반하는 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를 인용하는 것으로 이날 특강을 마무리했다.
KPI뉴스 / 진현권 기자 jhk102010@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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