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개최국 공용어도 사용 불가? FIFA 과잉 제한 논란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2026-06-15 17:10:06

기자회견서 스페인어 막아…스페인어권 분노
정치와 축구 관계에 대한 고무줄 잣대도 논란

국제축구연맹(FIFA)이 지난 11일(이하 현지 시간) 개막한 2026 북중미 월드컵 기자회견장에서 스페인어 사용을 거듭 막아 논란이다. 

 

▲ FIFA 홈페이지.

 

C조 브라질-모로코 경기를 앞두고 1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멕시코 기자가 모로코 선수 아슈라프 하키미에게 스페인어로 질문하자 FIFA 관계자가 막았다. 영어로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키미는 프랑스 리그 팀인 파리 생제르맹 소속이지만,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과거에 스페인 프로 축구 리그에서 활약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 결국 상황은 멕시코 기자가 스페인어로 묻고 하키미는 FIFA 방침에 따라 영어로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F조에 속한 네덜란드 선수 프렝키 더 용의 13일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스페인 리그 팀인 FC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더 용은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 더 용이 스페인어 질문에 스페인어로 답하려 하자 FIFA 측에서 막았다. 더 용 역시 영어로 답해야 했다.

브라질 공격수 비니시우스 주니오르의 12일 기자회견에서도 스페인어 사용은 막혔다. 스페인 리그 팀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는 비니시우스는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뿐 아니라 스페인어도 할 줄 안다. 비니시우스는 스페인어로 물어달라고 스페인 기자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FIFA 방침 때문에 스페인 기자는 영어로 묻고 비니시우스는 동시통역기를 통해 그 내용을 들어야 했다.

FIFA가 기자 회견장에서 스페인어 사용을 연이어 막은 것은 영어 및 해당 경기 참가국 언어에 대해서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방침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논란의 기자회견은 모두 미국에서 진행됐다.

스페인어권 지역의 축구 팬들을 중심으로 FIFA 방침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스페인어의 세계적 위상, 이번 대회와 관련성 등을 고려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는 미국, 캐나다와 이번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 멕시코의 공용어다. 국제연합(UN)에서 사용되는 공식 언어 6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서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인구보다도 많다(중국어에 이어 세계 2위).

이번 대회와 관련해 FIFA가 취한 조치 중 논란이 된 것은 이외에도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정치와 축구의 관계에 대한 고무줄 잣대다.

카리브해 국가 아이티 대표팀은 첫 경기를 며칠 앞두고 부랴부랴 유니폼 디자인을 바꿔야 했다. 아이티 대표팀 유니폼이 '정치적 메시지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며 FIFA에서 교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FIFA가 문제 삼은 유니폼에는 1803년 베르티에르 전투 장면이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가 10여 년에 걸친 항쟁 끝에 1804년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분수령이 된 전투다.

아이티 혁명으로도 불리는 아이티 독립은 세계사에서 비중 있게 거론된다. 주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착취를 당하던 흑인 노예들이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반란을 일으켜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세운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이티 대표팀은 이처럼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과 관련된 특별한 유니폼을 입고 월드컵 무대에 52년 만에 복귀하려 했다. 그러나 FIFA의 제지로 물거품이 됐다.

FIFA의 이 조치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200여 년 전 발생한 세계사적 사건에 대해서까지 '정치적 메시지 금지'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의문에 더해, 잣대의 일관성과 형평성 문제 때문이다.

영국 언론 BBC가 지적한 것처럼 이번 월드컵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에 의해 심각하게 정치화됐다. 미국 정부가 자국과 전쟁 중인 이란 대표팀 관계자 상당수의 입국 비자 승인을 거부한 것은 물론, 경기 주심 중 한 명인 소말리아 심판의 입국까지 막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대회를 과도하게 정치 문제로 얼룩지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FIFA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FIFA는 아이티 대표팀 유니폼 문양에 담긴 세계사적 사건에 대해서까지 '정치적 메시지'라며 쌍심지를 켠 것에 상응하는 조치를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서는 취하지 않았다.

잔니 인판티노 회장이 이끄는 FIFA가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실패 직후 FIFA 평화상을 신설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안긴 것의 연장선 위에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길게 보면, 정치와 스포츠의 분리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각국 주요 권력자들과 유착 문제 등 정치 관련 논란이 이어졌던 FIFA 역사와 무관치 않은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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