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배출권 넘어선 '계산할 권리'…신종 금융자산으로 진화
인프라 경쟁 뒤처지지 않으려면 구시대적 비효율 깨부숴야
미국 증시에 '반도체 연산력(compute) 지수(index)'를 거래대상으로 삼는 선물(先物, futures) 상품이 곧 등장할 예정이다. CNBC 보도에 따르면 실리콘데이터(Silicon Data)사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서 사용하는 반도체(GPU) 임대료를 지수화해 선물시장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은 비싼 GPU를 직접 사기보다 임차해 AI 학습이나 추론 등 비즈니스 AI 전환 경영에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2~3년 동안 AI 붐으로 엔비디아 H100, B200 같은 GPU 가격이 급등락했다. 당연히 반도체 임대료도 급등락했다. 급격한 가격 상승이나 하락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나온 게 선물이라는 금융시장의 파생상품이다. Futures, 즉 미래의 특정시점에 미리 약정한 가격으로 주식 또는 주가지수를 사고팔기로 계약한 상품을 말한다. GPU 가격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선물상품은 미래의 지수 상승 혹은 하락에 베팅함으로써 실물의 등락에 따른 손실을 보완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선물 상품의 구조이다. 곡물, 광물 같은 현물시장은 물론이고 주식, 채권 등 금융시장 상품은 모두 선물화할 수 있다. 자동차 산업의 철강, 건설 산업의 시멘트처럼 AI 산업의 반도체는 핵심자원이다. 그리고 그 반도체의 가격 등락이란 가격지수를 선물화한 것이 실리콘데이터사의 새 상품이 될 것이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GPU 사용권 자체가 하나의 금융 상품처럼 거래된다는 것이다. CNBC 보도는 실리콘데이터가 'GPU 가격지수(GPU Price Index)'를 창설한 다음 이 지수를 바탕으로 선물, 옵션 등 파생상품 시장을 만들 예정이라고 전했다. 앞서 4월 칼럼에서 AI 시대의 새 화폐, '토큰(token)'을 소개한 바 있다. 대규모언어모델(LLM)이 학습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 데이터의 기본단위가 토큰이고, 1개 토큰을 생산하는데 드는 반도체 연산력, 전기 등 자원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토크노믹스가 미래의 경제 시스템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선물시장에 조만간 선보일 GPU 가격지수 선물은 토큰보다 더 상단의 기초자산인 GPU에 주목한 상품이다. 크게 보면 같은 이야기다. 토크노믹스는 AI를 구동하는 연산력에, GPU 선물은 그 연산력의 바탕인 반도체 실물에 초점을 맞춘 데 불과하다.
둘 다 컴퓨터 연산력(compute)이 가장 희소한 자원으로 떠오르면서 미래의 가치척도 및 거래수단, 즉 화폐로 취급받을 것이라는 기술낙관론에 기대고 있다. 한때 데이터노믹스, 즉 데이터가 가장 중요자원으로 희소해지면서 '데이터=돈'이라는 주장이 유행했었다. 그런데 AI 성능을 결정하는 3대 요소인 데이터, 알고리즘, 연산력 가운데 데이터는 점차 풍부해지고 알고리즘은 공개되는 추세다. 오직 연산력만이 희소자원으로 남아있다. GPU는 산업화 시대의 연료인 석유에 비견되는 전략자산인 셈이다.
혹자는 환경 중시 ESG 경영의 탄소배출권과 유사한 권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유사한 점도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탄소배출권은 탄생 단계부터 정부 주도로 1톤의 CO₂ 배출권이란 가상의 자산을 창조하면서 시작됐다. 무형의 권리지만 법적인 가치를 지니고 거래대상이 됐다. 쉽게 말하면 탄소배출권은 '오염할 권리'이다. 산업별, 기업별로 오염할 권리의 상한선이 있고, 이를 초과해 배출하고 싶으면 탄소배출권을 사야 한다. 남는 기업은 팔고 모자란 기업은 산다. GPU 연산권 역시 '계산할 권리'이다. 예를 들어 'H100 GPU 1시간 사용권'도 탄소배출권처럼 사고 팔 수 있다. 하지만 탄소배출권은 국제사회의 정부 간 규제가 희소성을 창출한다면, 연산권은 반도체 공급 부족이란 물리적 조건이 희소성을 만드는 점에서 다르다. 탄소배출권은 정책이 바뀌면 가치가 사라질 수 있지만 연산권은 GPU 부족이 존재하는 한 가치가 유지된다.
금융의 역사는 권리의 금융화 역사이다. 달리 말해, 금융시장은 물건을 거래하는 곳이 아니라 권리를 거래하는 곳이란 뜻이다. 예컨대, 농산물 선물은 옥수수 자체를 거래하는 게 아니라 미래 옥수수를 인도받을 권리를 사고 파는 시장이다. 원유 선물, 탄소배출권 선물, GPU 선물도 마찬가지다. 이런 파생금융 상품을 블록체인이란 다중 보안장치에 올려놓으면 더욱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게 된다.
STO(Security Token Offering)는 증권을 블록체인 위에 올려 발행한 상품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 빌딩의 소유권 1000억 원을 10만 개 토큰으로 쪼개 거래하는 기술이다. 여러 투자자들이 나눠 가질 수 있으니까 자금 동원이 용이하고 유동성이 강화된다. GPU 클러스터 1만 장도 토큰화해 시간 단위 사용권을 발행하고 시장 거래에 내놓을 수 있다. 즉, GPU 사용권 STO가 등장할 수 있다. 비슷한 개념으로 RWA(Real World Asset)도 있다. 부동산, 미술품, 채권, 금 같은 현실 자산을 블록체인 위로 올리는 것이다. 미래에는 GPU도 RWA가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GPU는 실물 자산이면서 현금흐름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 운영사가 100억 원짜리 GPU 팜을 보유하고 있다면 사용권 판매-수익 발생-토큰 보유자의 배당 수취 등 유동화가 가능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의 토큰화 논의가 진행 중이다.
20세기의 금융시장은 주식, 채권,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21세기 초로 접어들면서 데이터, 플랫폼, 특허 등 지식재산(IP) 중심으로 옮겨왔다. AI 시대에는 연산력, 전력, 데이터센터가 금융시장의 중심이 된다. 즉, 금융의 대상이 기업→ 인프라→ 연산 자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농업 국가에서는 토지가 최고의 생산수단이었다. 산업 국가로 이행하면서 자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다시 디지털 경제로 국부의 원천이 데이터로 바뀌었지만, AI 시대에는 컴퓨팅 파워가 새 화폐로 부상한 것이다.
반도체 연산력 지수가 미국 금융시장에 신상품으로 곧 등장할 예정이라는 뉴스를 접하면서 생각했다. 그럼 우리나라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 추격자가 아닌 창조자로 체질을 바꾸어야한다는 자각은 있다. 데이터센터와 원전 건설 계획도 나왔다. 그런데 여기에 여전히 정치인의 지역안배, 공무원의 부처 간 힘겨루기 같은 구시대 낡은 비효율이 들어있다.
지난 6월 지방선거의 참정권 훼손을 혼내주었던 미래세대가 AI 자원전쟁에서도 참신한 경제혁신 마인드로 구태 정치인과 공무원을 혼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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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성열 논설위원 |
● 노성열은
30여 년 경력의 경제부 기자로 산업계와 인공지능(AI)을 주로 취재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 부처 및 경제 단체를 출입하면서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과 중소벤처업계 현장에서 발생하는 뉴스를 다루어왔다. 일본, 법제도, AI를 포함한 첨단 과학기술 등이 주 관심분야다. 언론계뿐 아니라 학계에도 진출해 지식재산권(IP) 인식 제고와 공학교육 개혁에 매진하고 있다.
△KAIST 공학석사,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일본지역학 석사, 고대 법대 및 한국외국어대 일본어학과 학사 △1991년 문화일보 입사 △북리뷰팀, 법조팀, 산업팀장, 전국(지방자치)부 부장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 회장(2024~)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외부협력 총장 보좌역(2024.6~) △영국 옥스퍼드대 미디어센터 VOX(Voice From Oxford) 컨설턴트(2024~) △국가녹색기술연구소 'Greenovation I&I' 편집위원(2024~)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2023~2026.3) △식품의약품안전처 정책자문위원(2020~2022)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데이터미래전략위원회 미래정책분과 자문위원(2021~2023)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인공지능 활성화 방안 연구' 총괄위원(2023) △주요 저서: 뇌 우주 탐험(이음, 2022), 인공지능 시대 내 일의 내일(동아시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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