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인 1951년 미군 폭격 등으로 수백 명 희생
진실화해위 "무연고자 포함하면 200명 이상 피살 추정"
'단양 곡계굴 사건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이 11일 국회에 발의됐다. 국민의힘 엄태영(충북 제천·단양) 의원 등 12명이 제출한 법안이다. 주요 내용은 국무총리 소속 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설치, 보상금과 의료 지원금 및 생활 지원금 지급, 추모재단 설립 등이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월 20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곡계굴과 하리·용진리 일대에서 민간인 수백 명이 미군 폭격 등으로 희생된 사건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2008년 발표한 조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상황을 되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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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제62주기 곡계굴 합동 위령제. 2013년 1월 23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곡계굴 위령비 광장에서 열렸다. [단양군 제공] |
영춘면은 충북에서 오지로 불리는 단양 내에서도 오지로 꼽혔다. 곡계굴은 천연 석회암 동굴로, 입구는 좁지만 내부는 넓었다. 사건 당시 곡계굴에는 영춘면 주민은 물론 타지에서 온 피란민까지 수백 명이 들어가 있었다.
굴에 들어간 것은 그곳이 폭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굴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미군이 "작전상 이유로 피란민들이 전투 지역을 벗어나 이동하지 못하도록 저지"(진실화해위)한 것도 사람들이 굴에 가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해 1월 전황은 불리했다.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북한군은 단양 쪽까지 밀고 내려왔다. 미군은 적을 저지하기 위해 단양 일대 초토화 작전을 계획하고, 피란민 상당수의 남행을 막았다. 북한군이 피란민으로 위장해 내려올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길이 막힌 많은 피란민은 곡계굴로 들어갔다. 이들이 데려온 다수의 가축은 굴 입구에 자리했다.
사건 당일 미군은 오전 9시 50분부터 11시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영춘면 일대를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곡계굴 앞에 사방을 불바다로 만드는 네이팜탄이 투하됐다. 굴 안에 그대로 있던 사람들은 연기에 질식해 쓰러졌다. 굴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미군의 기총소사에 희생됐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167명에 이르는 참사였다. 167명도 최소치일 뿐이다. 실제 희생자는 그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밝혀지지 않은 무연고 희생자를 포함하면 당시 200명 이상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영춘면 주민들 사이에서는 희생자가 360명이 넘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희생자의 다수는 갓난아기를 비롯한 미성년자와 여성이었다. 안전하다고 여긴 굴 안에 아이와 여성을 우선적으로 머물게 한 데서 비롯된 결과로 풀이된다.
폭격 직후 미군은 작전 일지에 굴 안의 적군들과 짐을 싣는 가축들을 공중에서 공격해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가축을 모두 잡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굴 안에 적군은 없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은 폭격 전날 곡계굴 인근 마을에서 모두 떠났다.
미군 공격으로 희생된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진실화해위는 미군이 "폭격 당시 인민군과 민간인을 구별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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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양곡계굴유족회 조병규 회장이 2022년 위령비에 새겨진 단양 곡계굴 사건 희생자들의 이름을 짚고 있다. [KBS 충북 화면 갈무리] |
억울하게 가족을 잃었음에도 유족은 배·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사건 발생 후 수십 년 동안 진상 규명과 배·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학살 피해를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도 어려웠다. 북한이나 좌익에 의한 학살이 아니라 미군 폭격으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 전국 곳곳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로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많은 부분이 국군, 경찰, 민간 우익 세력, 미군에 의한 학살이었는데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극우 반공 체제에서 금기시됐다. 이 문제를 거론하면 빨갱이로 몰려 큰 피해를 볼 수 있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극우 반공 체제가 이완되면서 경상도, 제주도 등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가 만들어졌다. 각지 유족회는 오랫동안 방치된 유골을 수습하고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비를 세우고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1961년 5·16쿠데타를 계기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5·16쿠데타 세력은 유족회 사람들을 대거 체포하고 용공 세력으로 몰아 중형에 처했다. 위령비를 정으로 쪼아 땅속에 묻고 피학살자 합동 묘지를 파헤쳤다. 학계에서는 5·16쿠데타 세력의 이런 행태를 '제2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강요된 침묵의 시간이 다시 이어졌다. 1987년 6월항쟁을 분수령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상당수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을 바탕으로 한 희생자 명예 회복 등의 조치가 국가 차원에서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단양 곡계굴 사건의 경우 명예 회복, 보상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 2008년 진실화해위가 '이 사건 희생자를 구제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고 위령 사업을 지원할 것'을 국가에 권고했지만, 제대로 된 후속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2017년 이 사건의 진상 규명과 추모 관련 법안이 제20대 국회에 제출됐으나, 주목받지 못하고 2020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어느덧 사건 발생 후 75년이 지났다. 이번에 발의된 '단양 곡계굴 사건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이 피해자와 유족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해원의 길을 열 수 있을까. 75년간 방치된 폭력의 상처를 이제라도 치유할 수 있을지, 사회적 공감과 정치권의 결단이 시험대에 올랐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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