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최측근 최형우, 독재와 맞서다 여러 차례 고초 겪어
1972년 유신 쿠데타 후엔 야당 의원 13명 고문실로 끌려가
박정희 지시 거역하면 여당 실력자들도 고문당하던 시대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야만의 시대로 퇴행할 수도
최형우 전 의원이 24일 별세했다. 최 전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이전에 독재 정권과 맞서다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독재 정권 시기에는 많은 사람이 고문을 받았다. 그중 최 전 의원 사례는 현직 국회의원임에도 고문실에 끌려갔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 |
| ▲ 25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최형우 전 의원 빈소. [뉴시스] |
독재 정권 시기 정치 비화(祕話)를 기록한 동아일보 기자 이경재의 책 '유신 쿠데타'와, 마찬가지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충식의 책 '남산의 부장들' 등에 당시 상황이 상세히 서술돼 있다. 두 책을 중심으로 최 전 의원('전 의원'과 '현직 의원' 표현이 교차하는 점을 고려해 아래에서는 '최형우'로 표기)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겪은 고문 피해를 되짚어 보자.
최형우는 36세 때인 1971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야당인 신민당 소속이었다. 이듬해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유신을 선포했다. 8일 후인 그달 25일 최형우는 서울 영등포에 있던 군부대에 끌려갔다.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야전용 침대 각목으로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최형우는 실신했다. 깨어난 후에는 알몸 상태에서 손발이 묶인 채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최형우에게 두 손을 모아 무릎을 끌어안고 깍지를 끼게 한 뒤 포승으로 묶었다. 각목을 최형우의 팔과 다리 사이에 끼워 양편 책상 사이에 통닭 바비큐처럼 매달았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그 위에 물을 부었다. 최형우는 숨이 막혀 또 실신했다. 최형우가 깨어나자 의사가 와서 혈압을 쟀다. 이어 고문이 재개됐다. 같은 방법의 고문이 8번이나 반복됐다. 물고문만이 아니라 전기 고문, 알몸 구타, 잠 안 재우기 등도 자행됐다. 그들은 최형우를 고문하며 '김영삼의 조직 상황과 자금 출처를 대라', '제보자를 대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제보자 색출 시도는 최형우의 석 달 전 발언과 관련된 것이었다. 최형우는 그해 7월 국회 본회의에서 총리에게 "청와대 측근들이 (중략)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 시안을 현재 구상 중"이라는 얘기가 들린다며 관련 내용을 물었다. 박 대통령이 극비리에 추진한 유신 쿠데타 내막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고문은 그에 대한 정권 차원의 응답이었다.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정도로 혹독한 고문에도 최형우는 제보자 이름을 대지 않았다. 결국 풀려났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해 11월 8일, 기관원들이 이번에는 최형우의 부인을 끌고 갔다. 최형우의 부인은 갖은 모욕을 받고 4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이 일로 최형우는 '내가 왜 정치를 시작했나'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신 쿠데타 후 고문실에 끌려간 현직 국회의원은 최형우만이 아니었다. 최형우 외에도 조윤형, 김상현, 이세규, 이종남 등 총 13명의 신민당 의원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들을 끌고 가 고문한 기관은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였다. 김충식 책에 따르면, 고문을 지시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이 유신 쿠데타를 앞두고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불러 '유신 선포 후 가만 놔둬서는 안 되는 악질 야당 의원' 명단을 넘겼다고 한다.
이들이 청와대에 밉보여 고문 표적으로 전락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윤형·김상현은 1970년에 발생한 정인숙 피살 사건에 박정희 정권 실력자들이 관련돼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국회에서 거론했다.
이세규는 1971년 실미도 사건 직후 '정부 발표와 달리 그들은 간첩이 아니라 실미도의 특수 부대 요원'이라는 사실을 공표해 박정희 정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군 장성 출신임에도 야당에 들어가 김대중 쪽에서 활동한 점도 박 대통령 눈에 좋게 보일 수 없는 요소였다.
이종남은 1972년 8월 국회에서 재미 사업가 박동선과 정권 고위층의 결탁 의혹을 제기했다.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에서 '박동선이 박정희 정부의 지시를 받아 미국 국회의원 등에게 뇌물을 줬다'고 폭로하며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로 번지게 되는데, 그보다 4년 2개월 전에 박동선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최형우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직후에도 보안사에 잡혀갔다. 이때도 현직 국회의원이었지만,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최형우 등 신민당 의원 13명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독재 정권 시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현직 국회의원의 다수는 야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여당 의원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최고 권력자 심기를 언짢게 하면 언제든 끌려갈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장기 집권을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하기 1년 전인 1968년에 발생한 국민복지회 사건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이때 여당인 민주공화당 소속 전·현직 의원들이 대통령 직속 기관인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들이 국민복지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3선 개헌을 반대하고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 한다'고 의심한 박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벌어진 일이었다.
유신 쿠데타 1년 전인 1971년에 발생한 10·2 항명 파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그해 10월 2일 국회에서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 결의안이 가결됐다. 3선 개헌에 앞장선 실세 4인(김성곤·백남억·길재호·김진만)을 중심으로 한 일부 여당 의원들이 박 대통령 지시를 따르지 않고, 야당의 오 장관 해임 시도에 동조한 결과였다.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그중 김성곤·길재호 등 일부 의원은 심한 고문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은 공화당의 돈줄로 불린 실력자였고, 좌익으로 활동하다 1946년 목숨을 잃은 박 대통령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길재호는 1961년 5·16쿠데타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육사 8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엄명을 거역한 '죄' 앞에서 이들의 그런 이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시 신민당 김한수 의원은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성곤, 길재호 두 선배는 (중략) 모 기관 철권에 의해 아주 타살되고 말았습니다. (중략) 몽둥이로 얼마나 치고 때렸는지, 참 표현할 말이 없어서 도리가 없습니다만, 생으로 무엇을 쌌다는 이야기입니다."
국회의원이 고문을 당하는 일은 이승만 정권 때에도 있었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에 휘말린 제헌 국회의원들도 그런 경우였다. 이승만 정권과 대립하고 친일 청산에 적극 나서며 소장파로 불리던 의원들이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때 기소된 의원 중 2명의 자녀들이 진실 규명을 신청한 사건에서 지난해 4월 인정한 것처럼, 당시 의원들은 헌병대에서 전기 고문 등 가혹 행위를 당했다.
21세기 한국에서는 지난날처럼 국회의원이 끌려가 가혹 행위를 당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적어도 그만큼은 사회가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일반 시민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의원까지 마구잡이로 끌고 가 고문하던 시대의 실상을 직시하기는커녕 도리어 왜곡하고 터무니없이 미화하는 이들이 적잖기 때문이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야만의 시대로 퇴행할 수도 있다. 최형우 별세를 계기로 국회의원 고문 잔혹사를 되짚은 이유다.
KPI뉴스 / 김덕련 역사전문기자 kdr@kpinews.kr
[ⓒ K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